[SOVAC Column] 함께해야 사는 사람들, 함께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는 10년 차 농부입니다.
이제야 저 스스로를 농부라고 소개하는 데 조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10년이라는 숫자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주는 것 같아요. 뭐하농 대표, 에트하우스 대표, 사단법인 농 이사장. 저를 소개하는 다양한 직함들이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제가 농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를 "농부"라고 소개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전,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괴산에 내려와 표고버섯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회사에서 시키는 "일" 말고, 진짜 우리 인생이라는 걸 살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 그 자체였습니다. 무작정 해답을 찾아야 겠다는 마음만 지닌 채 평생 부모님이 시키는 공부, 회사가 시키는 일에 익숙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보았습니다. '진짜 인생'을 찾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떠난 여정에서 처음 닿았던 것은 자연에 기댈 수 있는 농부의 삶이었습니다.
맨 처음 농촌을 찾을 때, 초보 농부들은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조차 몰라 당황하곤 합니다. 하지만 작목반 선생님들과 선배 농부들에게 묻고 배우는 시간들을 거치다보면 어느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조금은 능숙한 농부가 되기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초보 농부가 배우는 것은 농사 기술만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아도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자진해서 도움을 주는 마음. 작은 도움들이 모여 "함께"가 될 때,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조금은 쉽고 즐겁게 해결되는 힘.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경쟁이나 효율이 아닌 "함께"라는 마음. 그런 것들을 배우며 저희도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이 아니라 농"라이프"를 만들어가다
농부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경험이 없는 초보 농부에게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뭐하농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명사가 아닌 동사형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농업을 농산물로만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보자. 농부를 채소 기르는 사람으로만 기억하게 하지 말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와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게 해보자."
그래서 농업을 농사 안에만 가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땅에서 흙과 작물을 만지며 교감하게 하고, 농사 기법이 아니라 작물을 생태와 연결해 이야기하고, 그 경험들을 함께 쌓아가는 커뮤니티를 운영했습니다. 그렇게 벌써 6년째, 괴산에서 매년 4만 명 이상의 라이프파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뭐하농을 운영하며 특히 농촌에서 무언가 해보고 싶은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영상을 찍으며 농촌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어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 친구들을 보며 우리는 농"업"이 아니라 농"라이프"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이 아니라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느낌은 무척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직원도 외주도 아닌, 친구이자 파트너
저조차 농사를 짓기 위해 내려왔고, 선배님들에게 농사를 배웠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새로운 꿈을 안고 찾아온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구축해나간 관계는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도와주는 관계보다는 곁에서 서로의 일,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자라는 관계에 더 가까웠습니다. 농촌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다보니 오랜 시간 함께하고 있는 한 친구가 생각이 납니다. 뭐하농 청년마을 프로그램 참여자로 만난 친구인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감각이 좋고 성격도 좋아서 뭐하농 직원으로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저도 제 일을 해보고 싶어요"라는 거절의 멘트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뭐하농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꼭 한 회사로 묶이지 않더라도 뭐하농이 하는 일은 꼭 같이 하고 싶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멘토-멘티가 아닌, 고용주-고용인도 아닌 친구이자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프로젝트 매니저로 함께했고, 어느새 함께한 지 5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어떤 의미에서는 '직원'이라는 관계보다 훨씬 더 제 마음을 잘 알아주고, 손발이 잘 맞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건, 이 관계가 단순히 일을 주고 받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친구는 새로운 일이나 공부를 시작할 때마다 가장 먼저 저에게 내용을 공유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뭐하농과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태로 함께할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합니다. 저도 그 친구가 고민하는 방향을 보며 뭐하농이 앞으로 어떤 일을 더 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그 친구는 교육상담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뭐하농 역시 앞으로 '교육'에 더 깊이 몰입하려는 변화의 초입에 놓여있습니다. 처음엔 디자이너이자 이 후에는 영입 제안을 하고 싶은 친구로 만났지만, 이제는 뭐하농의 교육적 방향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가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일반적인 회사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관계는 다소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직원도 아니고, 외주도 아니고, 고객도 아닌 관계. 그런데 농촌에서는 바로 이런 유연한 관계들이 오히려 사업을 가능하게 합니다. 매일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아도 함께 일할 수 있고, 하나의 조직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아도 서로의 방향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부로서 자리 잡는 일도, 뭐하농이라는 기업을 운영하는 일도, 저희가 지역을 위해 일방적으로 공헌하거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역 안의 선생님들과 농부 친구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청년들과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함께해야 살고, 함께함으로 더 오래 살아간다
농"업"이 아니라 농"라이프"를 고민하기 시작하니, 지역이 다르고 작물이 다른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의 농부, 기획자, 교육자, 창업가 등 농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활동가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단법인 농, 농게더링은 그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시작되었습니다. 저에게 농게더링은 단체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각자의 지역에서 비슷한 마음으로 농촌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농게더링에서 우리가 처음 나눈 것도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질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농촌에서 살아가는가."
"농촌에서 무엇을 꿈꾸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곳에서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가."
"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감성적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농촌에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지역 안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
농촌에서 하는 일이 단순한 체험이나 상품 판매로만 소비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하는 일과 저 친구가 하는 일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농게더링에서 저희는 평소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질문들을 꺼내놓으며 함께 고민합니다. 누군가는 농부이지만 농산물만 팔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공간을 운영하지만 단순한 카페나 숙박업이 아닌 다른 의미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는 교육을 하지만 농촌이 하루짜리 체험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농촌에서 잘 살고 싶습니다. 동시에, 단기간에 최대 효율을 내는 방법보다는 오랫동안 로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혼자일 때는 약할 수 있지만, 함께함으로 강해지는 방법을 찾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누는 일이 손해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기회임을 배워갑니다.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저희는 함께 시도하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넘게 경험하고 있는 농촌에서의 삶은 저에게 함께하는 방식을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선배 농부에게 배운 것이 제 농사의 기반이 되고, 청년 농부들과의 대화가 뭐하농의 시작이 되고, 지역 주민들의 신뢰가 공간 운영의 힘이 되고, 청년들과의 협업이 농라이프의 확장이 되고, 전국의 농촌 활동가들과의 만남이 농게더링으로 이어지는 일들. 결국 함께함으로 완성되는 삶 속에 살아갑니다.
함께해야 사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결국, 우리는 함께해야 살고, 함께함으로 더 오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10년차의 농부로서 제가 농촌에서 배운 전부입니다.
기고 : 사단법인 농 이지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