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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AC Column] 어른들의 '여름방학'이 남긴 것

2026.07.21


프롤로그 | 어른들에게도 잡월드가 필요하다면

지난 2월, 충남 홍성 젤리스라운지에 로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충남에서 청년마을을 이끌어온 초록코끼리와 온어스, 서울과 경북을 오가는 임팩트스퀘어 실무자들이 지역에서 발견한 문제와 실험을 자유롭게 꺼내놓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누군가 던진 한마디가 시작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도 잡월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게 로컬에 있다면 어떨까요?”

어릴 적 우리는 요리사가 되어보고 소방관 옷을 입어보며 어른이 된 삶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준비해 얻은 직함으로 20년, 30년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다음은 어떨까요? 새로운 삶의 모양을 그려야 하는 순간, 세상은 은퇴를 ‘인생 이모작’이라 기대하지만 정작 아무런 준비운동 없이 사람들을 다음 출발선으로 떠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이 잡월드에서 대기업들이 직업 체험을 제공하듯, 어른들의 잡월드에서는 로컬 기업들이 새로운 방향을 안내해 보자는 데 뜻이 모였습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김부장의 여름방학’.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김부장’들이 일주일간 홍성에 머물며 로컬 창업가의 인턴으로 일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영화 같은 계획은 이번 여름, 홍성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곳에서 보낸 필자의 탐구생활 기록입니다.


내 일의 가치를 더 크게 바라봐주는 사람

70대의 동현은 평생 교육행정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퇴직 후 자신을 ‘여행자’라 소개하는 그는 낯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서 5시간을 달려 홍성에 왔습니다. 그가 합류한 곳은 수제 소시지를 만드는 ‘튜베어’ 진표의 가게였습니다. 낯선 지역에서 3년간 혼자 일해온 진표는 요즘 들어 스스로의 한계를 자주 마주하던 참이었습니다.

인턴십 마지막 날, 두 사람은 우체국에서 얼마 전 등록된 튜베어의 특허증 우편물을 찾았습니다. 진표에게는 그저 처리해야 할 일상 업무 중 하나였지만, 동현은 그 종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결실을 본 소중한 증거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튿날 공유회에서 동현은 진표의 특허증 수령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으며 함께 자리한 모두에게 축하의 박수를 청했습니다.

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대신, 한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쌓아온 시간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 것입니다. 박수 속에 쑥스러워하던 진표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습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의 경험은 단순히 답을 내놓는 기술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의 일을 다시 자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함께 땀 흘린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언어

미선은 20년 경력의 마케팅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홍성에서 보낸 시간 동안 그의 역할은 족집게 조언자가 아니었습니다. 미선은 닭을 기르며 작물을 재배하는 ‘작은밭’ 의 인턴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닭을 만져보고 비닐하우스 바닥에 앉아 닭장을 지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을 어르신들도 손을 보탰습니다.

낯선 노동을 함께한 시간은 작은밭 대표인 선영의 하루를 온전히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닭을 돌보고 시설을 보수하는 일상은 선영에게 별다를 것 없는 매일이었지만, 직접 들어가 보니 누군가에게는 일부러 찾아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경험일 수 있겠다는 마케터로서의 눈이 열렸습니다.

인턴십을 마칠 무렵 미선은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미처 느끼지 못하셨을 수 있어요.
선영님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콘텐츠입니다.”

거창한 컨설팅이 아니라 곁에서 일상을 나누며 깊이 공감한 파트너의 따뜻한 해석이었습니다. 닭장이라는 결과물보다 선영의 일상에 담긴 감정과 관계가 ‘작은밭’만의 진짜 가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뤄두었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땀을 흘린 뒤에야 20년의 경험은 상대의 마음에 닿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전문성은 관계를 대신할 수 없지만, 관계 위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단단한 일의 태도로 남은 성실한 시간  

55세의 선호는 경찰로 28년을 복무하고 올해 봄 퇴직했습니다. 긴장 속에 살아온 도시를 벗어나 새로운 일을 경험해 보고 싶었던 그가 머물 곳은 제철 식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물풀들’이었습니다.

첫날 선호는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고생했던 이야기를 꺼냈고, ‘물풀들’의 노을도 같은 일을 겪었다며 깊이 공감했습니다. 일해보기도 전에 두 사람은 각자의 아픔을 알아채며 마음의 거리를 줄였습니다. 선호는 노을과 함께 밭에서 제철 재료를 수확해 다듬어 음식을 만들고 과일청을 담갔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의 고됨에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했지만 맡은 몫을 해내려 애썼고, 새로 배운 내용은 수첩에 꼼꼼히 적었습니다.

경찰 경력이 요리에 직접 쓰인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현장 경험에서 몸에 밴 책임감과 진중한 태도는 내내 빛을 발했습니다. 힘들어도 주어진 일을 끝까지 마쳤고 모르는 것은 겸손히 적어가며 배웠습니다. 음식을 만들며 정을 쌓은 끝에, 노을은 선호를 ‘요리 친구’라 부르며 서로를 ‘식구’로 기억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래 쌓인 경험은 화려한 말보다 자기 몫을 대하는 단단한 자세를 통해 관계 안에서 작동했습니다.


다시 막내가 되어도 괜찮다는 가능성

20년 전, 지역개발을 공부하던 대학생 연희는 문당마을에서 오리농법과 생태마을의 비전을 배웠습니다. 이후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회사를 나온 지 한 달 만에 다시 문당마을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20년 전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낡은 찜질방이었던 공간은 마을 ‘며느리’들이 모여 빵과 커피를 파는 정겨운 카페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여성들이 현역으로 일하는 그 곳에서 연희는 전문가가 아닌, 빵 만드는 순서를 처음부터 배우는 막내가 되었습니다.

은퇴를 앞두고 연희가 두려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다음’이었습니다.

“회사를 나오면서 다음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데, 내 다음이 없을 것 같아 막막했어요. 이제 소비만 하며 살아야 하나 두려웠죠.”

문당마을에서 그가 본 것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현장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며 ‘나도 계속 일할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와 가능성을 얻었어요.”

20년 전 문당에서 지역의 가능성을 배웠던 연희는, 다시 찾은 문당에서 나이가 들어도 가치를 만들어내는 삶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그에게 이번 인턴십은 전문성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닌, 언제든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괜찮다는 용기의 시간이었습니다.


경험이란 전문성이 아닌 관계의 ‘럭키박스’

처음 우리의 관심은 ‘경험’ 이라는 자산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노하우가 지역의 작은 기업들과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궁금했습니다. 창업가들은 어떤 답을 얻고, 베테랑들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하는 질문에는 ‘경험=전문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6일의 시간이 지나고 남은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동현의 경험은 청년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관심이었고, 미선의 전문성은 함께 땀 흘린 뒤에야 마음에 닿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선호의 경험은 수첩을 들고 자기 몫을 다하는 묵직한 태도에서 드러났으며, 연희는 언제든 다시 신입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베테랑들이 건넨 것은 정답이 아닌 관심이었고, 해결책이 아닌 이해였으며, 노하우가 아닌 함께 머무는 태도였습니다. 경험은 전문성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관계 안에서 상대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이 되기도, 신뢰를 만드는 행동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실험이 어느 쪽에 더 이로웠는지 가르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창업가들은 자신의 일상을 들여다봐 주는 진짜 편을 얻었고, 베테랑들은 조직 밖에서도 여전히 가치 있는 일과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지역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화려한 풍경이나 특산품보다, 함께 일하고 밥을 먹으며 이름을 불러주었던 이들이 다시 그곳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주일 동안 생긴 관계가 거창한 프로젝트나 이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안부를 묻고 또 도움이 필요한 순간 기꺼이 손을 내밀 것입니다. 지역과 사람의 진짜 연결은 이런 작고 다정한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에필로그 | 푸르른 계절을 지나 다음 계절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노래 〈푸르른 날〉이 흘러나왔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가사가 지나온 일주일의 풍경과 포개어집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홍성에서 만난 베테랑들은 이미 눈부시게 푸르른 계절을 지나온 이들이었고, 로컬의 청년 창업가들은 지금 한창 가장 치열한 초록의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비와 햇살이 번갈아 내리쬐던 일주일, 이들은 서로의 계절을 교차하며 함께 푸르렀습니다. 대단한 성과 대신 함께 고민하고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작은 실험을 이어가려 합니다. 작은 실험 하나가 누군가의 다음 계절을 바꾸고, 언젠가 지역과 세대를 잇는 더 커다란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여름방학은, 역시 좋습니다. 


기고 : 임팩트스퀘어 류인선 로컬부문 실장


[SOVAC 사무국 주] 오는 9월 진행될 ‘SOVAC 2026’ 현장에는 ‘김부장의 여름방학’을 사진 및 영상으로 생생하게 기록해 전달하는 기획전이 마련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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