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이 ‘사회문제’라는 산을 오르기 전에 하는 일

2026.05.15

*본 콘텐츠는 SOVAC Together 콘텐츠 파트너 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의 아티클을 담고 있습니다.



숙련된 등반가는 무작정 산에 오르지 않아요. ‘어떤 산을 어떻게 오를지’부터 정해야 해요. 지도를 펼쳐놓고, 날씨를 확인하고, 어느 경로로 정상에 오를지를 먼저 그려요.


어떤 루트가 가장 안전한지, 어디서 쉬어 가야 하는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어느 방향으로 우회할 수 있는지를 따져보죠. 그 설계도 없이 출발하는 등반은 무모할 수밖에 없어요.


사회문제 해결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마음만으로, 혹은 넉넉한 예산만으로 사회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에요.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껏 준비한 솔루션*도 현장에서 겉돌기 마련이에요.

*솔루션(Solution):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제품, 서비스, 역량, 기술 등을 뜻해요.


그래서 세상파일이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앞서 공을 들이는 단계가 있어요. 바로 '사회문제를 원인별로 세분화하여, 문제를 구조화하는' 거예요.

어떤 산인지, 어느 경로로 오를지, 지금 우리가 오를 수 있는 산인지를 먼저 정밀하게 그려 보는 과정이죠.

**프로젝트(Project): 특정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표, 기간, 대상, 솔루션을 설정하고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사회변화 활동. 문제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성과를 측정하는 과정까지 포함해요.


이 구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솔루션이 아무리 훌륭해도 엉뚱한 문제를 풀게 돼요. 예산이 아무리 넉넉해도 엉뚱한 곳에 쓰이게 되고요.

프로젝트 기간 동안은 뭔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문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요.

때문에 출발 전에 제대로 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이번 글에서는 세상파일의 구조화 과정을 시각장애 아동 점자 문해력 교육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볼게요.

이 프로젝트를 고른 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복잡한 구조가 숨어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에요. 구조화 없이 뛰어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구조화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거든요.

 

문제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①: 프로젝트 기반 리서치


구조화는 사회문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하나의 문제처럼 보이는 것을 여러 겹으로 쪼개고, 원인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고, 우리가 실제로 손댈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작업이죠.


세상파일은 이 구조화 작업을 '프로젝트 기반 리서치'를 통해 해요. 그냥 자료를 모으는 조사가 아니라, 끝에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하는 리서치인데요.


바로 ①우리가 해결하려는 사회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②해결하려고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예요.


리서치를 통해 문제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솔직하게 구분하는 것까지가 리서치의 역할이에요.


크게 ①데스크 리서치 ②현장 리서치 ③사전(예비) 프로젝트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①데스크 리서치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찾고,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요


논문, 통계, 정책 자료 등을 통해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몇 명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떤 시도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해요.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점이 있어요. 데스크 리서치는 생각보다 한계가 명확해요. 사회적으로 주목도가 높고 대상 규모가 큰 문제일수록 자료가 풍부한 반면, 시각장애나 점자처럼 상대적으로 소외된 문제는 관련 논문도, 통계도, 정책 자료도 부족한 경우가 많아요. 점자가 필요한 시각장애 아동이 실제로 몇 명인지, 그 중 점자를 실제로 읽고 쓸 수 있는 아이가 몇 명인지 등 관련 수치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자료가 없다는 것 자체가 이 문제가 얼마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데스크 리서치는 문제의 '윤곽'을 잡는 데 집중해요.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사용할 수 있는 비율은 단 9.6%였어요. 10명 중 1명만이 점자를 읽고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이 숫자가 왜 이렇게 낮은지, 무엇이 문제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 안을 채우는 건 현장 리서치의 몫이에요.


다만 데스크 리서치에서 한 가지는 좁힐 수 있었어요. 누구에게 먼저 개입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에요. 점자를 못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면, 성인과 아동 중 어디서 변화가 더 크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동기는 언어와 문자를 습득하는 결정적인 시기예요. 이 시기에 점자를 익혀 두면 이후의 학습과 자립 전체의 기반이 되고, 이미 다른 방식에 익숙해진 성인보다 변화의 폭도 훨씬 커요.

데스크 리서치는 이렇게 '시각장애인 전체의 문제'를 '시각장애 아동'이라는 개입 지점으로 좁혀가는 출발점이 됐어요.


②현장 리서치 — 사회문제의 원인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고, 방향을 수립할 수 있어요


데스크 리서치가 문제의 윤곽을 잡아 준다면, 현장 리서치는 그 안을 채워 줘요. 세상파일은 시각장애 아동 당사자, 보호자, 맹학교 교사, 일반학교 특수교사, 특수교육지원청 담당자, 국립특수교육원, 특수교육학과 교수, 시각장애 복지관 담당자, 점자 관련 솔루션 개발 기관 등 이 문제와 맞닿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직접 만났어요. 심지어는 점자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분들까지요.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 데이터로는 담기지 않는 현장의 온도를 가져오기 위해서였어요. 교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당사자가 실제로 겪는 어려움이 다를 수 있고,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또 다를 수 있어요. 심지어 관계자들끼리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렇게 현장을 돌아보며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가장 중요하게 살펴본 건 시각장애 아동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고 있는가였어요. 우리가 점자 문제에 집중하는 게 맞을지 확인해야 했거든요.


시각장애 아동들은 잔존 시력 정도나 인지 정도에 따라 활용하는 학습 수단이 달라요. 크게 음성, 확대, 점자 세 가지인데요. 각각을 들여다보니 장단점이 뚜렷했어요.

음성은 별도로 배우지 않아도 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접근성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일상생활의 소통에서는 효과적인 부분이 있죠. 하지만 학습 영역에서는 조금 달라요. 맞춤법이나 정확한 정보 전달이 어렵고, 수업 중 이어폰을 끼고 음성을 들으면서 필기를 동시에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교과서를 읽으라는 지시가 있을 때도 대응이 어렵고, 수업 중 발표를 위해 자기 생각을 적어야 할 때도 음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확대는 잔존 시력이 있는 아이라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에요. 독서확대기로 교과서나 칠판 글씨를 크게 볼 수 있거든요. 하지만 학습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초등 고학년부터는 한계가 드러나요. 눈으로만 모든 학습 콘텐츠를 소화하다 보니 같은 양을 읽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눈의 피로도도 높아져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그렇다면 점자는 어땠을까요?


점자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쓸 수 있고, 문자로서 읽고 쓰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어요. 시력에 관계없이 평생 쓸 수 있는 수단이고, 교과목 공부뿐 아니라 이후 자립적인 생활 전반의 기반이 될 수 있어요. 세 가지 수단 중 학습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인 거죠.


그런데 왜 데스크 리서치에서 확인한 점자 사용 비율은 고작 9.6%였을까요? 현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점자는 음성이나 확대와 달리 별도로 '배워야' 하는 수단인데, 배울 수 있는 환경 자체가 갖춰져 있지 않았던 거예요.


맹학교는 전국에 12개뿐이고, 시각장애 복지관은 17개 중 5곳이 서울에 몰려 있어요. 일반 학교에 다니는 시각장애 아동은 점자를 배울 기관을 따로 찾아야 하지만 지방에는 선택지가 사실상 없어요. 가르칠 수 있는 전문 교사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아동용 학습 교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점자를 모르는 비장애인 부모가 가르쳐 주기도 당연히 어렵죠.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영어 점자는 약자와 단어 학습이 어렵고, 수학 점자는 작성 방식과 이미지 표현에 한계가 있었어요. 점자 정보 단말기의 아동 보급률도 낮았고요.


세상파일이 주목한 건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었어요. 점자를 배울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그 다음 문제들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거든요.


그래서 세상파일은 아이들이 점자를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첫 번째 개입 지점으로 잡았어요.

이렇게 설정한 프로젝트의 목표가 바로 점자 문해력*** 향상이에요. 즉, 점자를 읽고 쓰고 이해하는 능력을 높이는 것이죠.

***점자 문해력: 점자를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점형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에요. 읽기·쓰기·유창성·이해력 네 가지 영역이 모두 갖춰졌을 때 비로소 점자 문해력이 확보됐다고 볼 수 있어요.


③사전(예비) 프로젝트 — 우리의 문제해결 방향과 솔루션이 맞는지 확인해요


방향이 잡혔다고 해서 바로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는 않아요. 본 프로젝트에 앞서 '사전(예비) 프로젝트'로 작은 실험을 먼저 해요.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장에서 실제로 문제로 존재하는지, 우리가 생각한 방향이 맞는지를 작은 규모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전 프로젝트는 실패해도 괜찮아요. 오히려 실패했을 때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거든요.



세상파일은 스마트 점자 학습기 '탭틸로'를 활용해 시각장애 아동 7명을 대상으로 5개월간 소규모 교육을 진행해 봤어요. 우리가 직접 아이들의 점자 문해력을 높일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지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탭틸로는 블록의 핀을 직접 누르며 점형을 익히는 방식으로, 만지고 듣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점자와 친해질 수 있는 도구예요. 전국 시각장애 특수학교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을 만큼 현장에서 검증된 교구이기도 했고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7명 중 5명이 성취도 목표인 80점 이상을 기록했어요. 점자 학습을 거부하던 아이도 탭틸로를 사용하니까 게임처럼 점자를 익혔고요.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면 점자 문해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죠.


문제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②: 나열하고, 묶고, 추리고, 검증하고


리서치가 끝나면 수많은 정보들이 모여요. 세상파일은 이 정보들을 정리해 시각장애 아동용 교재·교구·커리큘럼 개발, 튜터 양성·매칭, 부모 교육으로 구성된 최종 솔루션을 도출했어요.


어떻게 이 솔루션에 도달했는지,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해 볼게요.


첫 번째는 ✔나열이에요. 리서치를 통해 발견한 내용들을 전부 꺼내 놓아요. 크든 작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단 보이는 것들을 모두 늘어 놓아요. 이 단계에서는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다 꺼내놓는 거예요.

시각장애 아동 점자 문해력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보들이 모였어요.


시각장애인의 점자 문맹률이 약 90%에 달한다는 것,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학습 교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점자 참고서를 변환하는 데 3개월 이상 걸린다는 것, 맹학교와 복지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 선생님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 비장애인 부모는 점자를 직접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 영어 점자는 약자와 단어 학습이 어렵다는 것, 수학 점자는 작성 방식과 이미지 표현의 한계가 있다는 것, 점자 정보 단말기의 아동 보급률이 낮다는 것 등등.


두 번째는 ✔묶기예요. 나열된 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고,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층층이 나눠요. 묶어 보니 크게 두 덩어리가 보였어요.

①점자 배우기의 어려움, ②점자로 공부하는 것의 어려움이었어요.

그리고 점자 배우기의 어려움 안으로 더 들어가보면 한글 점자, 영어 점자, 수학 점자가 각각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내려가면서 문제의 지형도가 점점 선명해지는 거예요.

세 번째는 ✔추리기예요.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할 수 있는 것 중에서도 무엇을 먼저 할지 순서를 정해요.

점자로 공부하는 것의 어려움 문제는 더 큰 시스템과 연결된 문제라 당장 세상파일이 손댈 수 없었어요.

반면 점자 배우기, 그 중에서도 한글 점자 학습은 교재, 교구, 튜터링을 통해 비교적 빠르게 변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한글 점자를 알아야 영어도, 수학도, 다른 교과목 공부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지점으로 잡았어요.


네 번째는 ✔검증이에요. 설정한 문제 → 원인 → 목표 → 솔루션, 이 네 가지가 하나의 논리로 연결되는지 확인해요.

문제는 시각장애 아동들이 한글 점자를 모른다는 것, 원인은 배울 시설·교사·교재·가정 내 지도자가 없다는 것, 목표는 기초 점자 문해율 50% 달성, 솔루션은 커리큘럼 개발· 튜터 양성·부모 교육이에요.

어느 하나라도 연결이 끊기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솔루션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검토해야 해요. 원인에 대응하지 않는 솔루션은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거든요.


지도는 계속 업데이트돼요


이렇게 구조화가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프로젝트를 설계할 수 있어요. 어떤 솔루션이 필요한지, 어떤 파트너가 필요한지,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지,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지가 구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구조화는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만 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처음에 그린 지도가 완벽할 수는 없어요.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고, 데이터가 쌓이고,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지도를 다시 꺼내 수정해야 해요.

지도의 정보가 계속 갱신되는 것처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도 계속 업데이트가 필요한 거죠.


사회문제 해결에서 구조화는 선택이 아니에요. 이 단계를 건너뛰면, 아무리 좋은 솔루션도 엉뚱한 곳에 쓰이고, 아무리 많은 예산도 흔적 없이 사라져요. 반대로 구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문제를 풀었다"고 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세상파일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각장애 아동 점자 문해력 교육 프로젝트를 런칭하고, 운영해 왔어요. 처음 그려 놓은 지도대로 흘러간 것만은 아니었어요. 중복장애 아동의 비율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튜터를 구하는 것도, 아동을 발굴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구조화 단계에서 그려놓은 지도가 있었기에, 흔들릴 때마다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원문 : [세상파일] 세상파일이 ‘사회문제’라는 산을 오르기 전에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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