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 Hub 칼럼] 도시의 그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본 횡단보도 앞 그늘막 실증실험

출처 : 사회적가치연구원 SV Hub (https://svhub.co.kr/)
글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 연구책임자 이태동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 연구원 김지연
올해 여름이 본격적으로 오기도 전에 더위를 부르는 말이 먼저 달라졌다.
한국에서는 기존의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에 더해 ‘폭염중대경보’와 ‘열대야주의보’가 새롭게 마련되었고, 일본에서는 35도 이상을 의미하는 극심한 더위의 날을 뜻하는 ‘맹서일(猛暑日 , 모쇼비)’을 넘어 최고기온 40도 이상인 혹독한 폭염의 날을 가리키는 ‘혹서일(酷暑日, 코쿠쇼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말이 달라진다는 것은 현실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폭염은 단순히 “덥다”라는 감각을 넘어 시민이 하루를 이동하고 기다리고 머무는 일상의 장면들을 다시 보게 하는 문제가 되었다.
폭염 대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무더위 쉼터 운영이나 냉방비 지원처럼 실내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지원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의 하루는 실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학교에서 버스정류장으로, 사무실에서 횡단보도로 이동하는 사이에도 더위는 몸에 닿는다. 이처럼 폭염은 실내에서만 관리되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걷고 기다리고 머무는 길 위에서 계속 마주하는 위험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늘’은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 시민이 길 위에서 더위를 견디고 이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생활 인프라가 된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몇 분,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몇 분, 뜨거운 보행로를 지나가는 짧은 시간, 이 작은 시간들을 정책의 대상으로 삼을 때, 폭염 적응은 시민의 일상 속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 한국의 그늘막, 일본의 횡단보도에 서다: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연구책임자 이태동 교수)은 기후에너지환경부 R&D 과제의 일환으로, 올해 일본에서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폭염 대응 시설이지만, 아시아에서도 한국과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만 확인되는 비교적 드문 도시 적응 인프라다. 실제로 JTBC가 2026년 5월 28일 보도한 기사에서는, 서울 중구의 횡단보도 그늘막 사진을 본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에 있을 때 도움이 됐다”라며 “일본도 이런 데 세금을 써야 한다”라는 취지의 반응을 보인 사례가 소개되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도심 속 시설이 관광객의 시선에서는 폭염 속 보행자를 배려하는 공공 인프라로 읽힌 것이다.

▲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에서 이태동 교수가 일본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의 필요성과 추진 배경을 설명하였다. (포스터 출처: 기획자의 집)
이처럼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꾸준히 확인되어 왔다. 다만 그 관심이 실제 실증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시 조건과 보행 환경 속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조정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늘막은 단순히 시설 하나를 옮겨 설치한다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로 구조와 보행 환경, 행정 규제는 물론 시민들이 실제로 어디에서 더위를 느끼고, 어떻게 길 위의 공공공간을 이용하는지까지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장 기반의 공동 탐색 방식인 리빙랩 접근이 필요하다. 리빙랩(Living Lab)은 실제 생활공간에서 시민, 행정, 전문가, 연구자가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시험하며 수정해가는 방식이다. 그늘막 실증 역시 일본의 도시 조건 속에서 어떤 그늘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함께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중략..)
☂️ 길 위의 실험실(Street Living Lab): 어떻게 그늘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늘은 작다. 그러나 그늘이 던지는 질문은 작지 않다. 시민이 걷고, 기다리고, 머무는 길 위의 더위를 줄이려면, 그늘을 단순한 시설로만 볼 수 없다. “일본에도 한국식 횡단보도 그늘막을 설치할 수 있는가”라는 처음의 물음은 현지조사를 통해 더 중요한 질문을 만났다. 일본의 거리에서는 어떤 그늘이 가능할까. 시민들은 어떤 그늘을 실제로 사용할까. 그리고 그 그늘은 누가 만들고, 어떻게 유지관리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그늘막도 도쿄의 거리에서는 전혀 다른 조건을 마주한다. 보도 폭이나 도로 위 시설물 설치 기준, 경찰과 행정의 권한, 지진과 태풍을 고려한 안전성, 설치와 유지관리의 주체, 시민들이 임시 구조물을 받아들이는 감각까지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늘은 하나의 설계도나 한 번의 설치로 완성되지 않는다. 거리의 물리적 조건을 살피고, 시민의 사용을 듣고, 가능한 방식을 실험하며 다시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리빙랩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리빙랩은 한 도시의 해답을 다른 도시로 옮겨놓는 과정이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늘의 사용을 설치 이전부터 함께 상상하고 논의하며, 시민이 걷고 멈추고 기다리는 자리에서 가능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횡단보도 앞은 하나의 길 위의 실험실, Street Living Lab이 된다. 기후적응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어쩌면 횡단보도 앞에서 시민이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살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시간 동안 시민이 어디에 서는지, 어떤 그늘을 찾는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관찰하고, 도시의 조건 속에서 가능한 해법을 함께 실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리빙랩의 공동창조(Co-creation, 共創) 방식으로 도시의 그늘을 만들어가려는 이유다.
이제 일본의 지자체들도 폭염 대응을 리빙랩 방식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나가와구(品川区) 도시계획과가 추진하는 ‘여름을 시원하게 만드는 폭염대책 솔루션의 공동창조’ 공모는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연구사업단은 공공R부동산과 함께 횡단보도 그늘막 첫 실증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시나가와의 거리에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자 도시의 그늘을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이 될 것이다.
